10층 암 병동 모퉁이 구석진 자리 휴게실 의자가 ㄷ자로 놓여있다.
혈압계와 주간지 책자가 꽂혀있는 이곳, 숱한 사람들이 애환을 안고 잠시 머물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곳
나의 긴 병원 생활의 안식처였다.
어느 늦은 밤 10층 병동에는 소동이 일어났다.
남편이 주사기를 모두 뽑아버려 환자복이 피범벅이 된 채로 간호실로 데려갔다.
수술 후유증으로 섬망증세를 보인 것이다.
집채만 한 영상기기가 병실로 올라와선 남편의 몸 구석구석을 촬영하고 있다.
어떻게 되나요? 황망해하면서 간호사에게 물었다.
주사기 바늘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요.
혈관을 타고 주삿바늘이 돌아다닐 수 있어 중환자실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간호사들이 헤죽헤죽 웃는 모습에서 혐오스럼을 느끼기도 했다.
가슴을 움켜잡고 휴게실에서 간신히 진정시켜보기도 했다.
다행히 그날 남편은 별 사고 없이 무사히 넘겼다.
수술부위를 초록색 끈으로 사지를 꽁꽁 묶었다.
벌써 다섯 번째 많이 힘드신 지요.
"그래요" 맞은편 의자에서 항암 주사를 맞고 있던 50대 유방암 환자는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간호사실에서 동동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았으리라.
그 후 내게 위로를 하던 그 사람은 구정을 이틀 앞두고 편안한 모습으로 먼 길을 갔다.
새해 정월 초 이틀 날 남편의 수술 날이다.
수술실은 5층, 침대를 수술실로 넘겼고 문이 덜커덩 닫힌다.
13층 병동
엘리베이터 안, 가운을 입고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을 수술하실 그 선생님이시다.
선생님…. 하고 나는 불렀다.
그리곤 남편의 성함을 밝히고선 한참의 침묵만 흘렸다.
13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내리면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 묵례로 인사를 하고 돌아 섰다.
손에는 묵주 알을 굴리면서 의사 선생님도 나의 인사와 같이 묵례로 답을 해왔다.
'저 선생님이 수술을 담당하셔. 나는 선생님을 아시지만 선생님은 나를 모르시잖아'. 잘 부탁합니다. 혼잣말을 해본다.
아들이 "엄마 참 잘하셨어요" 20일에 한 번 항암을 맞고 보름 동안 항암 약을 먹는다.
4번째 항암을 맞고선 남편은 감당하기가 힘들었나 보다.
24시간 중 20시간 이상을 눈을 감고 있다.
부작용이 너무 심했는지 손톱 발톱이 새 하얗다.
손등, 발등은 먹물을 부어놓은 듯 검게 변하고 구역질과 체중감소는 갈수록 심하기만 했다.